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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멀었고, 길이 멀어서 미리 헤어려본 시간은 너무 짧았다 ::: 포르투갈 하나


1.

_ 길은 멀었고, 길이 멀어서 미리 헤어려본 시간은 너무 짧았다. 할 수 있는 것보다 하지 못하는 것이 더 많을, 그 만큼의 시간처럼 보였고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씩 치워 놓을 때마다 길은 더욱 멀어지고 시간은 더 짧아보였다.


_ 짐을 챙기느라 한시간 밖에 자지 못했지만, 짐을 미리 챙겨두지 않았다는 후회보단, 짓눌린 어깨에 캐리어 대신 배낭을 선택했다는 후회가 더 컸다. 사위는 아직 어두웠고 새벽 첫 공항버스는 쉽게 도착했다. GPS 로거의 깜빡거리는 불빛을 보다 잠이 들었다. 이른 새벽을 다독여 떠나는 공항 버스 안의 시간은 늘 피곤했고, 그 피곤은 출발 몇시간 전에나 짐을 챙기기 시작한 게으름 때문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게으름의 반 쯤은, 아마 짐을 챙기는 시간 만큼 들어가는 가져갈 카메라와 필름을 고민하는 시간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공항버스에서 느끼는 출발의 설레임같은 것은, 아마도 서둘러 챙긴 짐과 함께 섞여버려 몇시간 뒤 가방을 열고 짐을 꺼내기 전엔 느낄 수 없을 것 같았다.


_ 가끔, 공항이라도 가야 살 것 같은 때가 있었다. 하지만 정말 공항에 가면 더 살 수 없을 것 같아 가지 못했지만, 그럴 때도 정작 짐을 둘레매고 공항에 도착하면 공항은 늘 무덤덤했다. 공항 버스 하차장과 수속 카운터는 늘 멀었고, 수속 카운터에서 보딩 게이트는 더 멀곤 했다. 시간은 늘 애매해서 출국장으로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들었고, 검색대에서 필름을 꺼내들고 수검사를 해달라고 해야한다는 사실이 귀찮았다. 공항은, 공항으로만 있어줄 때만 늘 그리웠다.


2.

_ 사막은 아직 겨울이었다. 비행기는 베이징을 지나며 북으로 경로를 틀었고, 머리를 울란바토르로 둔 채 빠른 속도로 북상했다. 아래로 펼쳐진 땅은 옅은 붉은 빛이었다. 낮은 언덕들이 굴곡을 만들고 가끔씩 미스터리 서클같은 도로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지만, 지평선까지 이어진 그 황야는 외로워 보였다. 봄은 아직 멀어 땅에는 한기가 배어있었고, 호수와 좁은 강들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거나 하얗게 얼어있었다. 지난 시절 못먹고 자란 아이의 얼굴에 핀 겨울 버짐처럼 얼어붙은 황야의 호수와 강은 안쓰러워 보였다.

_ 지평선 근처는 하얀 빙해였다. 아직은 먼 지평선을 보며 가파른 빙벽으로 몸을 두른 차가운 극해를 상상했다. 파도가 치면 빙벽이 무너지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살풍경한 상상속의 빙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운해로 바뀌었다. 극해의 끝자락 눈보라가 몰아온 거대한 파도를 받아내는 빙벽같이 보이던 것은 가까이 다가갈 수록 지면 위에 검은 그림자를 단단히 세운 구름으로 변했다. 사람이 갈 수 있는 곳은 여전히 '극'과는 먼 듯 했지만 금방이라도 차가운 모래 바람을 자신들이 단단히 서있는 검은 그림자 속으로 몰고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은 구름의 바다는 그 냉기 속에서 여전히 빙해였다.

_ 구름은 점점 짙어져 끝내 하늘을 흰 빛과 푸른 빛으로 갈라 놓았고, 두 빛깔 사이에서 색도 형도 잃어버리는 모호한 경계인 지평선을 보다 잠이 들었다. 잠은, 지평선처럼 모호하고 지루했다. 그래서 좁은 의자 위에서 몸을 뒤틀며 잔 잠은 꿈과는 멀었다. 몽롱한 기운은 머리부터 몸을 타고 내려왔지만, 고행 같은 불편함은 발끝부터 타고 올라왔다. 신발을 찾아 신으며 잠에서 깼다.

_ 창 밖은 이제 동토였다. 하얗게 덮인 눈들은 떠나온 곳에서 가져온 나의 계절감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구별됨으로 기묘한 모양을 만들어내던 황야의 길과 달리 동토의 길은 애초부터 문양인양 금방이라도 지면과 분리될 태세였다. 하얗게 자신을 땅위에서 발라내는 길들은 옆구리에 경작지를 하나씩 달고 이를 날개 삼아 꿈틀거렸다. 모스크바가 곧 옆으로 지나간다고 했다.

_ 또 짧은 잠이 지났지만 밖은 여전히 동토의 모습이었다. 눈은 창에서 전해지는 차가움만큼이나 깊은 듯 했다. 다만, 짧은 잠이 지난 뒤의 동토는 이제 사람이 만들어 놓은 흔적들을 품어 가고 있었다. 얼룩처럼 늘던 흔적이 모여 사람이 사는 땅위를 날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쯤 비행기는 북해로 접어 들었다. 발틱해라 명명되는 바다를 지나고, 칼마가 옆으로 흐르고 코펜하게인 얼마남지 않았을 땐, 땅은 더이상 차갑지 않았다. 푸르름은 아직 모자라 남색에 더 가까웠지만, 붉은 땅 위엔 어두운 남색빛의 녹음이 들어찬 것이 보였다. 난 스칸디나비아 반도 위를 날고 있었다.


_ 다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한자리에만 앉은채 열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구름이 보이긴 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비행이라고 불렀고, 그 때쯤, 떠오른 것은 명백한 대상을 향한 그리움이었다. 두번째로 나온 기내식은 맛있었고 함께 마신 와인은 볼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뻣뻣해진 볼을 타고 취기와 함께 명백한 대상을 향한 그리움은 빠르게 올랐고, 난 브레멘과 하노버 사이를 지나고 있었다. 그리움은 열시간 사이 마신 두캔의 맥주와 와인 탓인지 모른다, 란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맥주와 와인 사이의 취기 사이에서 그리움과 함께 떠올린 것은 한편에선 동물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고, 한 쪽에선 공업 박람회로 시끌벅적한 도시를 비행기가 가로지르는 풍경이었다. 울음이 날 것도 같았지만, 금방 웃음이 날 것도 같았다.


_ 나는 너무 쉽게 국경을 넘었다. 억양과 강세가 강한 발음의 지명은 시간이 지날수록 물러져갔다. 기후만큼이나 다른 말의 외양은 수천년이란 시간을 지내고서도 서로 통하지 못했는데 나는 그 수천년의 불가능성을 불과 몇시간만에 가로지르고 있었다.

_ 말만큼 단단하고 날카로운 것이 없을진데, 그 말이 넘지 못한 벽을 난, 내 스스로 넘고 있었다. 수 천년, 수 만년을 말을 묶어 놓은 그 둔턱을 무심히 넘고 있었다. 서울이 베이징을 넘고, 모스크바를 넘고, 스톡홀름과 베를린을 넘어 파리가 되었다.

by Kivuli | 2009/05/08 22:19 | 가슴아픈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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